국내 유명 전자메이커의 연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연수원에서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김차장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내가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박00 사원이 귓속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회장님 아드님이신데 이번에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하셨거든요, 오며 가며 눈도장 찍으시려고 저러시는 거예요. 지는 해보다는 떠오르는 해 옆에 있어야 한다고 그러시는데… 저는 아직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직 조직만 바라보며 주어진 일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공기업이 아닌 이상 오너일가의 일거수일투족에 무관심한체 조직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고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직급이 어느 정도 있는데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운의 사나이 장진호
국내 시중은행들이 요새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중에 ‘중소기업 2세 경영자의 모임’이라는 것이 있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 된 프로그램이 IBK 기업은행이 주관하는 모임인데, 최근 <매경이코노미>가 이 프로그램에 합류한 2세들을 취재하여 대담기사를 낸 적이 있다. 내용보다 “큰 거 한방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오늘도 이들은 잠을 못 이룬다”는, 기자의 마지막 코멘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고뇌하는 2세경영인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지금은 망가진, 전설의 기업 진로(眞露)에서 2세 경영자로서 그룹을 이끌었던 장진호 회장이다. 나는 사실 그 분을 잘 모른다. 단지 그 분 곁에서 평생을 보낸 선배를 통해 그 분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2015년 어느 봄, 양재역 근처의 어느 허름한 삼겹살 집에서 그 선배와 소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명문대에 갓 입학한 아들 자랑에 한창 목소리가 올라가던 선배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TV에 시선이 박힌 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TV에 뭐가 나오길래 그러나 하고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뉴스 시간이었고, 진로그룹의 회장이었던 장진호 씨가 중국 북경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자막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진로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장진호 회장. 재계서열 26위 기업의 총수로서 한 세상을 풍미했던 그였지만 분식회계, 비자금조성 등의 혐의로 형을 선고받으면서 기약 없는 해외도피 생활이 시작되었고 결국은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 분을 오랫동안 모셨던 선배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만만치 않은 충격을 느꼈기에 잠시 눈을 감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작은 인연이긴 하지만 나는 그 분과 사석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93년도 봄에 장진호 회장이 도쿄에 온 적이 있는데 당시 그 분을 수행하고 일본으로 건너온 선배가 저녁 술자리에 나를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밀스런 통역이 필요해서였다.
선배는 사적인 통역 때문에 불러내서 미안하다며 약간의 용돈을 손에 쥐어주긴 했지만, 이유와 상관없이 나는 기분이 좋았다. 당시 나는 학생이었고, 학생신분으로 말로만 듣던 대기업 총수를 직접 만나는 일이 그리 쉽게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역을 하면서 알게 된 대화 내용은 고인의 사적인 정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큰 거 한방을 보여주어야 해!”라고 말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장진호 회장의 얼굴만큼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의 대화는 그룹 내에 존재하는 파벌싸움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장진호 회장은 경영권을 승계함에 있어서 삼촌, 사촌 들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소 무리하게 보이는 사업확장도 2세 경영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경영의 성공요소는 가족중력과 공정인사
가업을 이어받아 더욱 크게 성장시킨 2세 경영자들이 많다. 반대로 경영승계가 이루어진 후에 소리 없이 사라진 승계기업의 수는 그 보다 훨씬 더 많다. 승계자가 2세에서 3세로 갈수록 생존 확률은 더 희박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가족기업연구소에 따르면 기업이 창업주의 대를 이어 2대까지 생존하는 비율은 30%, 3대까지도 건재하게 경영되고 있는 장수기업 비율은 12%, 4대 이상까지 살아남는 초 장수기업의 비율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가족이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가족기업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전 세계 기업의 80%가 가족기업으로 추산될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들은 장기적 일자리의 최대 공급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가족기업들이 전체 노동자의 60%를 채용하고 신규 일자리의 78%를 창출하고 있다. CEO 선임같이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들은 미국 S&P 500대 기업의 33%, 프랑스와 독일의 250대 기업의 40%,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대기업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가족기업연구소는 말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갈수록 경영승계 기업의 숫자는 늘어날 것으로 예측이 된다. 요즘은 후계자를 대동하고 모임에 참석하는 회장님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2세, 3세 경영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우리회사 고객들 중에서도 2세 경영인이 아버지를 도와 회사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영승계 기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분석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짧은 지식이나마 경험의 범위 내에서 승계기업의 성공요소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일 누가 나에게 “가족기업의 성공의 포인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개인적으로 다음 3가지 요소를 열거하고 싶다. 첫 번째가 가족중력(Family Gravity)이고, 두 번째가 공정인사(Clean HR System)이며, 세 번째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다.
첫번째의 ‘가족중력’은 창업주 가족의 일치된 단결과 이를 기반으로 한 지원을 말한다. 어느 기업이든 창업주가 있기 마련이다. 아직 경영일선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 창업주가 되었든 은퇴하거나 혹은 세상을 떠난 경우가 되었든 창업주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은 그 기업의 레거시(Legacy)로 남아 있어야 한다. 또한 창업주의 가족은 이러한 레거시가 시대를 관통하여 유지되게끔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7,80년대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던 대기업 중에는 창업주의 외도로 인하여 배다른 형제들 간의 권력암투가 많았다. 아쉽게도 80, 90년대 경영승계 기업의 경우 이 부분이 취약하여 기업이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선도기업의 부끄러운 역사가 반면교사로 작용했는지 최근의 경영승계 기업을 보면 이러한 오점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 경영권 승계를 앞두고 회장 주변의 신변정리나 자식들의 지분정리는 확실히 해 둔다는 점이다. 3, 40대 후계자들의 경영승계와 관련하여 부모들은 지분정리와 관련하여 상당한 노하우와 함께 철저한 사명감을 가지고 승계작업에 임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오너일가의 경영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가족중력은 어느 정도 살아있는 듯해 보인다.
두번째는 ‘공정인사’다. 서두에서 설명하였듯 최근 승계기업에게 있어서 가족중력은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하다. 반면 아버지와 아들, 형제자매 사이에 보이는 묘한 줄타기 인사의 문제점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어느 오너기업 회장의 장남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그 후배는 “이번 人事에서 과거 회장님과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전부 부활해서 앞으로 피 바람이 예상된다”는 말을 했다. 또 다른 지인은 “회장님 차남 쪽에 있는 사람들이 건방지게 우리 쪽 의견을 무시하고 있는데, 더 크기 전에 손 한번 봐야겠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내 앞에서 한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사가 공정하게 이루어질까?
비록 우리나라가 아닌 북미지역에서 조사된 연구결과이기는 하지만, 가족기업의 인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연구 리포트가 있다. 하버드경영대학원의 보리스 그로이스버그(Boris Groysberg)교수와 동 대학원의 데보라 벨(Deborah Bell)연구원은 가족기업과 비가족기업에서 종사하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 자신의 인사고과 점수를 매겨달라고 요청했는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가족기업에서의 인사고과 점수가 비가족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고, 특히 인재관리 점수가 많이 인색했다. 게다가 자사가 인재를 발굴, 채용, 유지, 혹은 해고하는 인재쟁탈전에서 선전하고 있거나 직장 내 다양성을 잘 활용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채 10%도 되지 않았다.
수십 년간 가족기업만을 연구한 영국의 이곤젠더(Egon Zehnder)라는 컨설팅 회사가 국제가족기업네트워크(Family Business Network International)와 함께 선도적인 가족기업 50곳을 분석하여 내 놓은 연구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가족출신과 비가족출신 경영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몇 가지 베스트 프랙티스를 발견했다. 가장 성공적인 가족기업들은 좋은 지배구조를 기준으로 삼고, 가족중력을 보존하며, 가족 안팎에서 골고루 인재를 발굴해 육성하고 체계적인 CEO 승계계획을 세운다.”
실패를 두려워 않는 창업가정신이 필요하다
가족중력과 공정인사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하나의 키워드를 더 제시하고 싶다. 바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벤처정신이자 선대회장님이 회사를 창업할 당시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조직을 원점(Zero Base)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창업가정신을 말한다. 물려받은 조직을 지키기보다는 파괴하고 떠나는 守->破->離의 정신을 말한다.
최근 경영승계가 이루어진 2세의 경영자들을 보면 두 가지 부류의 후계자들이 있다. 선친이 작고하고 안 계신 상태의 경영승계와 아직도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상황에서의 경영승계이다. 큰 스트레스는 아무래도 선친이 아직 생존해 계시는 2세들이 훨씬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여차하면 아버지가 다시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밀려나고 다른 제 3자가 후계자로 임명될 수도 있다는 불안요소가 남아있다.
선친이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경우는 좀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회사를 경영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선친을 대신하여 고생하는 우리 2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동정론이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 선친이 살아 계시거나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경우는 문제가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물러나 계신 회장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회장님을 의식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러나서 지켜보고 계시는 회장님도 별로 원치 않는 일이다.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회장님을 의식하여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한다면 회사 내의 다른 고용직원들과 별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2세 경영자보다는 보통의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2세 경영자는 오너프리미엄을 충분히 살려서 추진력을 발휘하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비록 실패한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 빠른 회복탄력성으로 무장하는 창업가정신이 필요하다. 실제로 내가 알고 지내는 창업주 회장님들은 모두 이점을 크게 강조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자제분들은 지나치게 회장님을 의식하고 소극적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간섭이 들어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회사를 좀 더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오히려 생존확률 30%라는 통계가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지금도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2세 경영자들을 위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글로서 정리해 보았다. 그들의 건투를 빌어본다.
글쓴이: 신경수 박사 (SGI지속성장연구소장 / 인간개발연구원 부원장)
국내 유명 전자메이커의 연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연수원에서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김차장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내가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박00 사원이 귓속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회장님 아드님이신데 이번에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하셨거든요, 오며 가며 눈도장 찍으시려고 저러시는 거예요. 지는 해보다는 떠오르는 해 옆에 있어야 한다고 그러시는데… 저는 아직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직 조직만 바라보며 주어진 일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공기업이 아닌 이상 오너일가의 일거수일투족에 무관심한체 조직생활을 할 수는 없다.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고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직급이 어느 정도 있는데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뒤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운의 사나이 장진호
국내 시중은행들이 요새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중에 ‘중소기업 2세 경영자의 모임’이라는 것이 있다. 여러 프로그램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 된 프로그램이 IBK 기업은행이 주관하는 모임인데, 최근 <매경이코노미>가 이 프로그램에 합류한 2세들을 취재하여 대담기사를 낸 적이 있다. 내용보다 “큰 거 한방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오늘도 이들은 잠을 못 이룬다”는, 기자의 마지막 코멘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고뇌하는 2세경영인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지금은 망가진, 전설의 기업 진로(眞露)에서 2세 경영자로서 그룹을 이끌었던 장진호 회장이다. 나는 사실 그 분을 잘 모른다. 단지 그 분 곁에서 평생을 보낸 선배를 통해 그 분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2015년 어느 봄, 양재역 근처의 어느 허름한 삼겹살 집에서 그 선배와 소주를 마시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명문대에 갓 입학한 아들 자랑에 한창 목소리가 올라가던 선배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TV에 시선이 박힌 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TV에 뭐가 나오길래 그러나 하고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뉴스 시간이었고, 진로그룹의 회장이었던 장진호 씨가 중국 북경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자막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진로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장진호 회장. 재계서열 26위 기업의 총수로서 한 세상을 풍미했던 그였지만 분식회계, 비자금조성 등의 혐의로 형을 선고받으면서 기약 없는 해외도피 생활이 시작되었고 결국은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 분을 오랫동안 모셨던 선배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만만치 않은 충격을 느꼈기에 잠시 눈을 감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작은 인연이긴 하지만 나는 그 분과 사석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93년도 봄에 장진호 회장이 도쿄에 온 적이 있는데 당시 그 분을 수행하고 일본으로 건너온 선배가 저녁 술자리에 나를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밀스런 통역이 필요해서였다.
선배는 사적인 통역 때문에 불러내서 미안하다며 약간의 용돈을 손에 쥐어주긴 했지만, 이유와 상관없이 나는 기분이 좋았다. 당시 나는 학생이었고, 학생신분으로 말로만 듣던 대기업 총수를 직접 만나는 일이 그리 쉽게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역을 하면서 알게 된 대화 내용은 고인의 사적인 정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큰 거 한방을 보여주어야 해!”라고 말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장진호 회장의 얼굴만큼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의 대화는 그룹 내에 존재하는 파벌싸움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장진호 회장은 경영권을 승계함에 있어서 삼촌, 사촌 들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소 무리하게 보이는 사업확장도 2세 경영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경영의 성공요소는 가족중력과 공정인사
가업을 이어받아 더욱 크게 성장시킨 2세 경영자들이 많다. 반대로 경영승계가 이루어진 후에 소리 없이 사라진 승계기업의 수는 그 보다 훨씬 더 많다. 승계자가 2세에서 3세로 갈수록 생존 확률은 더 희박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가족기업연구소에 따르면 기업이 창업주의 대를 이어 2대까지 생존하는 비율은 30%, 3대까지도 건재하게 경영되고 있는 장수기업 비율은 12%, 4대 이상까지 살아남는 초 장수기업의 비율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가족이 소유하거나 경영하는 가족기업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전 세계 기업의 80%가 가족기업으로 추산될 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그들은 장기적 일자리의 최대 공급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가족기업들이 전체 노동자의 60%를 채용하고 신규 일자리의 78%를 창출하고 있다. CEO 선임같이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들은 미국 S&P 500대 기업의 33%, 프랑스와 독일의 250대 기업의 40%,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대기업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가족기업연구소는 말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갈수록 경영승계 기업의 숫자는 늘어날 것으로 예측이 된다. 요즘은 후계자를 대동하고 모임에 참석하는 회장님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2세, 3세 경영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우리회사 고객들 중에서도 2세 경영인이 아버지를 도와 회사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영승계 기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분석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짧은 지식이나마 경험의 범위 내에서 승계기업의 성공요소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만일 누가 나에게 “가족기업의 성공의 포인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개인적으로 다음 3가지 요소를 열거하고 싶다. 첫 번째가 가족중력(Family Gravity)이고, 두 번째가 공정인사(Clean HR System)이며, 세 번째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다.
첫번째의 ‘가족중력’은 창업주 가족의 일치된 단결과 이를 기반으로 한 지원을 말한다. 어느 기업이든 창업주가 있기 마련이다. 아직 경영일선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 창업주가 되었든 은퇴하거나 혹은 세상을 떠난 경우가 되었든 창업주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은 그 기업의 레거시(Legacy)로 남아 있어야 한다. 또한 창업주의 가족은 이러한 레거시가 시대를 관통하여 유지되게끔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7,80년대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던 대기업 중에는 창업주의 외도로 인하여 배다른 형제들 간의 권력암투가 많았다. 아쉽게도 80, 90년대 경영승계 기업의 경우 이 부분이 취약하여 기업이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선도기업의 부끄러운 역사가 반면교사로 작용했는지 최근의 경영승계 기업을 보면 이러한 오점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이 경영권 승계를 앞두고 회장 주변의 신변정리나 자식들의 지분정리는 확실히 해 둔다는 점이다. 3, 40대 후계자들의 경영승계와 관련하여 부모들은 지분정리와 관련하여 상당한 노하우와 함께 철저한 사명감을 가지고 승계작업에 임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오너일가의 경영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가족중력은 어느 정도 살아있는 듯해 보인다.
두번째는 ‘공정인사’다. 서두에서 설명하였듯 최근 승계기업에게 있어서 가족중력은 어느 정도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하다. 반면 아버지와 아들, 형제자매 사이에 보이는 묘한 줄타기 인사의 문제점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어느 오너기업 회장의 장남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그 후배는 “이번 人事에서 과거 회장님과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전부 부활해서 앞으로 피 바람이 예상된다”는 말을 했다. 또 다른 지인은 “회장님 차남 쪽에 있는 사람들이 건방지게 우리 쪽 의견을 무시하고 있는데, 더 크기 전에 손 한번 봐야겠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도 없이 내 앞에서 한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사가 공정하게 이루어질까?
비록 우리나라가 아닌 북미지역에서 조사된 연구결과이기는 하지만, 가족기업의 인사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연구 리포트가 있다. 하버드경영대학원의 보리스 그로이스버그(Boris Groysberg)교수와 동 대학원의 데보라 벨(Deborah Bell)연구원은 가족기업과 비가족기업에서 종사하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 자신의 인사고과 점수를 매겨달라고 요청했는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가족기업에서의 인사고과 점수가 비가족기업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고, 특히 인재관리 점수가 많이 인색했다. 게다가 자사가 인재를 발굴, 채용, 유지, 혹은 해고하는 인재쟁탈전에서 선전하고 있거나 직장 내 다양성을 잘 활용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채 10%도 되지 않았다.
수십 년간 가족기업만을 연구한 영국의 이곤젠더(Egon Zehnder)라는 컨설팅 회사가 국제가족기업네트워크(Family Business Network International)와 함께 선도적인 가족기업 50곳을 분석하여 내 놓은 연구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가족출신과 비가족출신 경영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몇 가지 베스트 프랙티스를 발견했다. 가장 성공적인 가족기업들은 좋은 지배구조를 기준으로 삼고, 가족중력을 보존하며, 가족 안팎에서 골고루 인재를 발굴해 육성하고 체계적인 CEO 승계계획을 세운다.”
실패를 두려워 않는 창업가정신이 필요하다
가족중력과 공정인사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하나의 키워드를 더 제시하고 싶다. 바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벤처정신이자 선대회장님이 회사를 창업할 당시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조직을 원점(Zero Base)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창업가정신을 말한다. 물려받은 조직을 지키기보다는 파괴하고 떠나는 守->破->離의 정신을 말한다.
최근 경영승계가 이루어진 2세의 경영자들을 보면 두 가지 부류의 후계자들이 있다. 선친이 작고하고 안 계신 상태의 경영승계와 아직도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상황에서의 경영승계이다. 큰 스트레스는 아무래도 선친이 아직 생존해 계시는 2세들이 훨씬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여차하면 아버지가 다시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밀려나고 다른 제 3자가 후계자로 임명될 수도 있다는 불안요소가 남아있다.
선친이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경우는 좀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회사를 경영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선친을 대신하여 고생하는 우리 2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동정론이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 선친이 살아 계시거나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경우는 문제가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물러나 계신 회장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회장님을 의식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물러나서 지켜보고 계시는 회장님도 별로 원치 않는 일이다. 뒤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회장님을 의식하여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 한다면 회사 내의 다른 고용직원들과 별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2세 경영자보다는 보통의 직원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2세 경영자는 오너프리미엄을 충분히 살려서 추진력을 발휘하는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다. 비록 실패한다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 빠른 회복탄력성으로 무장하는 창업가정신이 필요하다. 실제로 내가 알고 지내는 창업주 회장님들은 모두 이점을 크게 강조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자제분들은 지나치게 회장님을 의식하고 소극적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간섭이 들어오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회사를 좀 더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오히려 생존확률 30%라는 통계가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지금도 자신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2세 경영자들을 위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글로서 정리해 보았다. 그들의 건투를 빌어본다.
글쓴이: 신경수 박사 (SGI지속성장연구소장 / 인간개발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