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바둑판의 돌을 놓는 것과 같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지를 끊임없이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선택은 조직의 도약을 부르지만, 잘못된 선택은 조직의 침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리더들은 선택의 순간, 어떤 기준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 그들이 고민했던 역사적 순간들을 청취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읽는 통찰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본 코너의 운영 목적이다. 이번 달은 우즈베키스탄 AKITA대학교의 설립자인 정옥래 이사장을 취재했다.
“대학교를 설립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어?”
Q1. 지금 있는 곳을 소개해 달라. AKITA는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가?
AKITA는 ‘한국IT연합대학교’로서 우즈베키스탄에서 금년 9월 설립한 한국형 IT대학교입니다. 이 대학교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IT산학협력을 목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된 특수목적 대학교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단순히 학위를 주는 대학교가 아니라 한국에서는 부족한 IT인력을 수급하여 아웃소싱을 제공받고, 우즈베키스탄은 한국의 우수한 IT기술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대학교와 더불어 실제 비즈니스 교류를 위해 양국에 대표부가 설치되어 IT아웃소싱을 위한 교류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Q2. 자기소개를 좀 해달라. 개인 이력이 궁금하다.
영국에서 유학했고, 영국에서 삼성전자의 유럽 국제구매 담당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국과 유럽의 구매대행을 위한 마케팅 회사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고, 관련한 컨설팅 회사를 한국에서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경영지도사밖에 없던 한국컨설팅 시장의 기회를 보고 ‘한국컨설팅연합회’(現한국컨설팅산업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경험했던 노하우를 살려서 조그마한 회사를 차려, 스타트업들을 지원하는 일과 교육사업을 위한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한국컨설팅산업재단 이사장직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Q3. 본인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큰 전환점을 꼽으라면 군 복무를 카투사(KATUSA)에서 보급행정병으로 근무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저 그런 젊은이로 방황하던 갓 2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미군부대에서 경험한 언어, 문화, 행정업무, 도전의 경험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나를 영국유학으로 이끌었고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부도 관련분야에서 했고, 삼성전자에서도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국제바이어로서 유럽 각국 기업들과의 협상 경험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 그 경험으로 관련 회사도 만들었고, 컨설팅업에까지 이르렀고, 결국은 이렇게 대학설립까지도 한 것이니 카투사 복무가 저에게는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듯합니다.
Q4.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하는 경영활동이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만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걸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굳이 꼽자면 경영컨설팅업종도 없던 시절에 경험도 충분치 않았던 30대의 나이로 세계적 경영컨설팅사들을 설득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경영컨설팅산업협회’를 창설한 경험에 대한 자부심이 좀 있습니다. 이 조직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생생한 경영공부도 많이 했고, 컨설팅업 산업표준, 컨설턴트양성교육, 컨설팅표준방법론 등을 저술했습니다. 거기에 벤처기업 투자, 해외진출 등의 정책을 기획하여 일조한 것도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Q5. 반대로, 인생에서 가장 큰 쓰라림을 준 사건이나 사고를 꼽는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쓰라림을 말하라면 1박2일은 필요할 듯합니다. 가끔 지인들에게 살아온 얘기를 술자리에서 할 때가 있는데 출판업을 하는 지인이 듣더니 ‘망해도 일어나는 법’이라고 책 제목까지 정해 주면서 지금 당장 쓰라고 조른 적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고생은 좀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고생담을 3개 정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로 청소년때의 일입니다. 당시는 아버지의 숱한 사업실패로 전국을 떠돌며 이사가 이어지던 때입니다. 감수성이 컸던 저는 버티기가 힘들어 방학 때마다 가출을 했는데, 한번은 영세한 가방공장의 지하실 공장에서 자다가 여름장마로 물이 차서 죽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아예 집을 나가서 부산에서 몇 달을 배를 타고 선원생활을 한 적도 있고, 가방 하나 들고 전국을 떠돌며 미역양식장, 식당청소, 벽돌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몸이 아파 돌아왔고, 다행히 카투사가 되어 입대를 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해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사회생활 초기의 일입니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친 저는 삼성전자에 입사를 했습니다. 초기에는 승승장구 주변의 인정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좀 배운 거 가지고 돈 좀 벌어보려는 생각에 때려 치고 마케팅회사를 차렸다가 2년도 안돼 돈 한푼 못 벌고 쫄딱 망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되었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컨설팅회사를 차려 3년을 일했지만 빚도 못 얻을 만큼 어려워져서 또 망했지요. 그래도 다행히 남을 자문할 수 있다는 컨설팅업의 마력에 빠져 포기하기 않은 덕에 주위 전문가들에게 기획력을 인정받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경영컨설팅협회를 운영하면서 발생한 횡령과 분쟁입니다. 협회는 컨설팅을 주업으로 하는 100여개 회사가 모여서 구성된 사단법인이었는데, 설립되고 얼마 안 있어 회원사들의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직원의 횡령사건이 터지면서 협회가 둘로 쪼개지는 사태가 발생했지요. 각종 고소고발이 이어졌고, 민형사 소송을 수년간 처리하다 보니 같이 일하던 변호사들이 저에게 ‘만주변호사’라는 칭호도 붙여 주더군요. 만주변호사,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법률가도 아닌데, 법적 지식이 상당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공이란 건, 해 본 적이 없고 망하면 왜 망했지? 라며 오히려 기존보다 더 큰일을 기획해서 그 위기를 넘어가며 성장해온 스타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공을 못해서 은퇴도 없다. 평생 비즈니스 기획자로 살자’가 모토가 됐습니다.
Q6. 사람에 대한 질문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하도 사람한테 데이다 보니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또 특별한 인사철학도 가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거의 본능적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냥 경험치로 생성된 내 의식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 좋은 면 만을 아낌없이 인정해 주자. 그리고 가장 높게 인정할 때, 헤어질 결심을 하자”로 굳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사람은 안 변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상황이 변해서 그에 맞게 살겠다는데 그걸 누가 어떤 제도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Q7. CEO의 가장 중요한 마인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 마다 경영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CEO들의 마인드까지 내가 주제넘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를 반추해서 보자면. 난 무슨 일을 사업경영의 목적으로 해 본적이 없었기에 돈 하고는 별로 인연이 없는 삶을 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경영자로서의 자격이나 마인드는 저하고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왜 이걸 하지?”라고 자문하고 그 일의 명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명분을 재미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재미가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자신감을 얻고, 남을 설득하며, 선한 영향력이 뿌려진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업을 시작하는데 GCC(최고경영자과정)에서 만난 동기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나이에 이제 다 정리하고 상속하고 할 판인데 너는 그 위험하고 힘든 일을 지금 하려는 이유가 뭐야?” 저는 별로 고민 안하고 답했습니다. “재밌잖아! 대학교를 설립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어?” 어느 사업을 하던 재미와 명분이 있다면 결과는 따라오리라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저는 그런 CEO가 되고 싶습니다.
🔈 리더인터뷰는 HDI인간개발연구원과 SGI지속성장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코너로서 GCC 회원사를 대상으로 취재하는 기획 기사입니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바둑판의 돌을 놓는 것과 같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지를 끊임없이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선택은 조직의 도약을 부르지만, 잘못된 선택은 조직의 침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리더들은 선택의 순간, 어떤 기준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 그들이 고민했던 역사적 순간들을 청취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읽는 통찰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본 코너의 운영 목적이다. 이번 달은 우즈베키스탄 AKITA대학교의 설립자인 정옥래 이사장을 취재했다.
“대학교를 설립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어?”
Q1. 지금 있는 곳을 소개해 달라. AKITA는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가?
AKITA는 ‘한국IT연합대학교’로서 우즈베키스탄에서 금년 9월 설립한 한국형 IT대학교입니다. 이 대학교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IT산학협력을 목적으로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지원으로 설립된 특수목적 대학교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단순히 학위를 주는 대학교가 아니라 한국에서는 부족한 IT인력을 수급하여 아웃소싱을 제공받고, 우즈베키스탄은 한국의 우수한 IT기술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대학교와 더불어 실제 비즈니스 교류를 위해 양국에 대표부가 설치되어 IT아웃소싱을 위한 교류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Q2. 자기소개를 좀 해달라. 개인 이력이 궁금하다.
영국에서 유학했고, 영국에서 삼성전자의 유럽 국제구매 담당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한국과 유럽의 구매대행을 위한 마케팅 회사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고, 관련한 컨설팅 회사를 한국에서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경영지도사밖에 없던 한국컨설팅 시장의 기회를 보고 ‘한국컨설팅연합회’(現한국컨설팅산업협회)를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경험했던 노하우를 살려서 조그마한 회사를 차려, 스타트업들을 지원하는 일과 교육사업을 위한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한국컨설팅산업재단 이사장직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Q3. 본인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나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큰 전환점을 꼽으라면 군 복무를 카투사(KATUSA)에서 보급행정병으로 근무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저 그런 젊은이로 방황하던 갓 2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미군부대에서 경험한 언어, 문화, 행정업무, 도전의 경험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나를 영국유학으로 이끌었고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습니다. 공부도 관련분야에서 했고, 삼성전자에서도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국제바이어로서 유럽 각국 기업들과의 협상 경험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 그 경험으로 관련 회사도 만들었고, 컨설팅업에까지 이르렀고, 결국은 이렇게 대학설립까지도 한 것이니 카투사 복무가 저에게는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듯합니다.
Q4.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하는 경영활동이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만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걸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굳이 꼽자면 경영컨설팅업종도 없던 시절에 경험도 충분치 않았던 30대의 나이로 세계적 경영컨설팅사들을 설득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경영컨설팅산업협회’를 창설한 경험에 대한 자부심이 좀 있습니다. 이 조직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생생한 경영공부도 많이 했고, 컨설팅업 산업표준, 컨설턴트양성교육, 컨설팅표준방법론 등을 저술했습니다. 거기에 벤처기업 투자, 해외진출 등의 정책을 기획하여 일조한 것도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Q5. 반대로, 인생에서 가장 큰 쓰라림을 준 사건이나 사고를 꼽는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쓰라림을 말하라면 1박2일은 필요할 듯합니다. 가끔 지인들에게 살아온 얘기를 술자리에서 할 때가 있는데 출판업을 하는 지인이 듣더니 ‘망해도 일어나는 법’이라고 책 제목까지 정해 주면서 지금 당장 쓰라고 조른 적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고생은 좀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고생담을 3개 정도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로 청소년때의 일입니다. 당시는 아버지의 숱한 사업실패로 전국을 떠돌며 이사가 이어지던 때입니다. 감수성이 컸던 저는 버티기가 힘들어 방학 때마다 가출을 했는데, 한번은 영세한 가방공장의 지하실 공장에서 자다가 여름장마로 물이 차서 죽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아예 집을 나가서 부산에서 몇 달을 배를 타고 선원생활을 한 적도 있고, 가방 하나 들고 전국을 떠돌며 미역양식장, 식당청소, 벽돌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몸이 아파 돌아왔고, 다행히 카투사가 되어 입대를 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느 해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사회생활 초기의 일입니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친 저는 삼성전자에 입사를 했습니다. 초기에는 승승장구 주변의 인정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좀 배운 거 가지고 돈 좀 벌어보려는 생각에 때려 치고 마케팅회사를 차렸다가 2년도 안돼 돈 한푼 못 벌고 쫄딱 망해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되었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컨설팅회사를 차려 3년을 일했지만 빚도 못 얻을 만큼 어려워져서 또 망했지요. 그래도 다행히 남을 자문할 수 있다는 컨설팅업의 마력에 빠져 포기하기 않은 덕에 주위 전문가들에게 기획력을 인정받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경영컨설팅협회를 운영하면서 발생한 횡령과 분쟁입니다. 협회는 컨설팅을 주업으로 하는 100여개 회사가 모여서 구성된 사단법인이었는데, 설립되고 얼마 안 있어 회원사들의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직원의 횡령사건이 터지면서 협회가 둘로 쪼개지는 사태가 발생했지요. 각종 고소고발이 이어졌고, 민형사 소송을 수년간 처리하다 보니 같이 일하던 변호사들이 저에게 ‘만주변호사’라는 칭호도 붙여 주더군요. 만주변호사,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법률가도 아닌데, 법적 지식이 상당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공이란 건, 해 본 적이 없고 망하면 왜 망했지? 라며 오히려 기존보다 더 큰일을 기획해서 그 위기를 넘어가며 성장해온 스타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공을 못해서 은퇴도 없다. 평생 비즈니스 기획자로 살자’가 모토가 됐습니다.
Q6. 사람에 대한 질문이다. 사람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하도 사람한테 데이다 보니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또 특별한 인사철학도 가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거의 본능적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냥 경험치로 생성된 내 의식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자. 좋은 면 만을 아낌없이 인정해 주자. 그리고 가장 높게 인정할 때, 헤어질 결심을 하자”로 굳어져 버린 것 같습니다. 사람은 안 변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상황이 변해서 그에 맞게 살겠다는데 그걸 누가 어떤 제도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Q7. CEO의 가장 중요한 마인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 마다 경영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CEO들의 마인드까지 내가 주제넘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를 반추해서 보자면. 난 무슨 일을 사업경영의 목적으로 해 본적이 없었기에 돈 하고는 별로 인연이 없는 삶을 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경영자로서의 자격이나 마인드는 저하고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왜 이걸 하지?”라고 자문하고 그 일의 명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명분을 재미로 알고 살아왔습니다. 재미가 있어야 능률이 오르고, 자신감을 얻고, 남을 설득하며, 선한 영향력이 뿌려진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업을 시작하는데 GCC(최고경영자과정)에서 만난 동기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나이에 이제 다 정리하고 상속하고 할 판인데 너는 그 위험하고 힘든 일을 지금 하려는 이유가 뭐야?” 저는 별로 고민 안하고 답했습니다. “재밌잖아! 대학교를 설립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어?” 어느 사업을 하던 재미와 명분이 있다면 결과는 따라오리라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저는 그런 CEO가 되고 싶습니다.
🔈 리더인터뷰는 HDI인간개발연구원과 SGI지속성장연구소가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코너로서 GCC 회원사를 대상으로 취재하는 기획 기사입니다.